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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깊이 읽기 (사랑의 정의, 캐릭터 분석, 영화적 완성도)

by 롤리로그 2026. 1. 31.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쓴 순수하고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정서경 작가와 공동 집필한 각본은 도스토옙스키의 후기 장편 소설을 연상시키는 깊이를 담고 있으며, 극단적인 인물 설정과 심리 묘사, 문어체 대사를 통해 독특한 분위기를 완성합니다. 배우들의 눈빛과 침묵, 어색한 대화가 자극적인 장면보다 더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나 범죄물이 아닌,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사랑의 정의: 요구 없이 주는 완전한 헌신

'헤어질 결심'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도 가능한 말이다. 바로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 받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기보다 먼저 사랑받기를 원하고, 어떠한 보상도 없다면 상대에 대한 사랑을 지속할 힘을 금세 잃어버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두 주인공 해준과 서래는 이러한 일반적인 사랑의 공식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해준은 부산 최연소 경감으로 FM대로 수사를 진행하는 유능한 경찰입니다. 그는 산처럼 단단하게 자리와 원칙을 지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자신의 품위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박적으로 청결에 집착하며 집안의 물건들과 업무를 보는 곳은 한치의 흐트럼도 없이 질서를 지키는 그는 마치 태산 같은 남자입니다. 그러나 서래를 만나면서 그가 지키던 모든 질서와 도덕은 녹아내립니다. 해준이 아내에게 김치찌개를 끓여주는 장면과 서래에게 취조 중에 스시를 사주는 장면의 대비는 이미 그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해준은 서래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관계의 진전을 위해 노력을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서래에게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고 말한 순간, 이것은 명백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형사로서의 양심과 의무를 버리면서도 서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해준이 보여주는 사랑의 형태입니다. 서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해준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넘어서 자신까지 희생시키면서도 해준에게 사랑받을 결심을 완전히 포기합니다. 뜨겁기보다 조용하고, 확신보다는 망설임에 가까운 이들의 사랑은 대사가 아니라 배우의 표정으로 완성됩니다.

캐릭터 분석: 태산과 심연, 그리고 거울의 구조

해준과 서래는 극과 극에 있는 인물들입니다. 해준이 태산처럼 단단하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서래는 깊은 바다의 심연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서래는 바다에서 왔으며, 밀입국하다 바다에서 죽을 뻔 했고, 종종 카메라 앵글은 바다 모양의 벽지를 배경으로 하는 서래를 비춥니다. 하지만 서래와 연결되는 바다의 이미지는 생명과 자유가 아니라 깊은 심연과 해저의 어둠에 가깝습니다.
초반 영화는 의도적으로 서래에 대해 관객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서래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담당 형사를 유혹하고 수사를 무마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화장실에서 향수를 뿌리고 취조실에 들어가며,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는 모호한 말로 해준을 뒤흔듭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서래가 해준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해준이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라고 말했을 때라는 것을요. 무죄를 위해 명백히 자신이 해준을 이용했음에도, 해준의 답은 끝까지 서래를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구조적 특징은 1부와 2부가 거울처럼 대칭을 이룬다는 점입니다. 1부에서 해준이 서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형사로서의 양심을 버렸듯이, 2부에서 서래는 해준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짓도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버립니다. 서래는 '마침내'라는 말로 상징되는 강인한 의지를 가진 인물입니다. 살기 위해 어떠한 마침표도 찍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그녀는 가정 폭력을 견디지 못해 남편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죽였고, 마침내 해준을 지키기 위해 자신까지도 죽입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해준 삶에 있어서 약점이자 시한 폭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박해일 배우의 연기는 이러한 복잡한 감정선을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해냅니다.

영화적 완성도: 도스토옙스키를 닮은 박찬욱의 미학

박찬욱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복수는 나의 것'을 찍을 때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도스토옙스키 후기 장편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작품입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일상적으로 보기 힘든 환상적인 인물 설정, 그럼에도 느껴지는 깊은 핍진성, 눈사태처럼 극이 진행할수록 커져가는 몰입감, 작중 인물들의 극단적인 행동과 심리, 현실에서 잘 쓰이지 않는 문어체 대사의 사용 등이 그러합니다. '죄와벌'과도 유사한 점을 보이는데, 두 작품 모두 구조적으로 범죄 심리 장르의 공식을 따르면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진짜 이야기는 주인공의 심리 변화와 사랑에 관련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소품과 배치, 영상미, 음악은 주관적인 부분이지만 객관적으로도 훌륭합니다. 특히 서래가 자신의 진심을 말할 때 서툰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로 말하고, 그것이 딱딱한 말투로 핸드폰을 통해 번역되다가 해준에 대한 마음을 표현할 때 번역기의 목소리가 여성으로 바뀌는 장치는 섬세함의 극치입니다. 해준이 서래를 위해서 헤어질 결심으로 아내가 있는 이포에 왔지만, 점점 상태가 좋아지는 아내와 달리 해준은 하루하루 시들어갑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배우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됩니다.
이 영화는 15세 이용가로 개봉했지만 흥행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중적인 정서의 영화는 아닙니다. 런닝타임 동안 완급조절의 실패한 장면이나 씬들이 없지는 않았고, 극 중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들이 널뛰기를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들어서 보는 도중에 피로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내려놓고 두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감정을 따라간다면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그동안 전작에서 보여왔던 지나친 선정성과 폭력성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15세 이용가 영화로서도 본인의 개성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영화를 온전히 만들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한 번에 다 이해하려고 보기보다는 여운을 남기며 천천히 음미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물들 간의 극단적인 행동은 우리가 실제로 겪는 현실과 거리가 있지만, 두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과 사랑은 이질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입니다. 2022년에 개봉한 영화지만 마음까지 시리도록 추운 2026년의 겨울에 다시 꺼내봐도 좋을 작품입니다. 보고 나면 "이게 사랑이었나?"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고, 그래서 쉽게 잊히지 않는 영화입니다.


[출처]
클리앙 게시판: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439823